도심 투어
12월 8일 일요일 2013년
송년회를 위한 모임으로 도심 투어를 선택했다.
10시 안국역 3번 출구 쪽 지하 2층의 만남의 자리에서 15명이 집합했다. 이제는 문자만 보내도 시간을 잘 지켜 집합할 줄 아는 서울 시민다운 모습을 갖춘 회원들께 감사했다. 특히 충주, 원주, 수원에서 오는 회원들도 시간을 맞추어 오는 대단한 성의를 보였다. 어디로 갈 것인지 토의(북촌 한옥마을, 창덕궁과 운현궁, 조계사~인사동, 관현갤러리, 경인 미술관~수운회관~운현궁)를 한 끝에 조계사에서 운현궁을 선택했다.
조계사로 이동해 경내를 관람한 후 불교중앙박물관에서 인각사에 대한 유물들을 관람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643년(선덕여왕 12)에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 절의 입구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있는데, 속전(俗傳)에 기린이 뿔을 이 바위에 얹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인각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1307년(충렬왕 33)에 일연(一然 : 普覺國師)이 중창하고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 당시 이 절은 크고 높은 본당을 중심으로 하여 그 앞에 탑, 좌측에는 회랑, 우측에는 이선당(以善堂) 등이 있었고, 본당 뒤에 무무당(無無堂)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일연은 총림법회(叢林法會) 등 대규모의 불교행사를 개최하였다. 시대는 미상이나 조정의 명으로 김용검(金龍劍)이 절을 크게 중건하고 밭 100여 경(頃)을 헌납하였다. 조선 중기까지 총림법회를 자주 열고, 승속(僧俗)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2동의 요사채 뿐이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428호로 지정된 인각사보각국사탑 및 비(麟角寺普覺國師塔─碑)가 있다. 이 탑비는 1153년(의종 7)에서 1155년 사이에 사승(寺僧) 죽허(竹虛)가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모아서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글자의 훼손이 심하여 알아보기 어렵다. 그 밖에도 법당 앞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정조탑 앞에는 높이 1.5m의 석불이 있으며, 절 앞 길가에는 만월당(滿月堂)과 청진당(淸眞堂)의 석종형 부도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각사 [麟角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박불관을 관람 후 정원에서 임영은이 준비해 온 차를 한 잔 할 때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정원 한 구석에는 을사조약 이후 나라의 운명이 기울자 자결을 한 계정 민영환선생의 동상이 쓸쓸히 서 있었다. 45세의 한창나이로 2천만 동포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두 통 남기고 품고 있던 단도로 목을 찔러 자결한 충신이다.
우정국(서울우정총국)을 둘러보고 길을 건너 인사동으로 들어가 관훈갤러리의 전시실을 관람했는데 별로 관심이 없는 부문들의 전시라서 20여분 만에 나왔다. 다른 전시실로 올라간 회원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경인미술관으로 이동하여 각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사진, 동서양화, 누비옷, 그리고 현대판 작품 전시실을 보며 마음의 양식을 채웠다. 정원의 아기자기한 조경을 둘러보고 골목을 지나 수운회관의 예배당을 들렸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종교화된 순수한 민족종교로 유교 불교 선교를 종합(?)한 교리를 가졌다고 한다.
다음으로 길을 건너 운현궁으로 들어갔을 때는 12시가 다 되었다. 입장권을 사고 해설을 요구했다. 해설사님의 해설과 함께 여러 곳에서 설명을 들었지만 머리 속에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궁궐은 아니었으나 궁궐보다 더 큰 위세를 누렸던 집이다.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고종이 출생하고 자란 곳이기도 하다. 고종은 후사가 없던 철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26대 왕이 되는데 그때 나이가 12세였다. 어린 고종을 대신해 흥선대원군이 조선을 다스리게 되니 이 집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만했다고 한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궁’이라는 이름을 받은 이곳은 점점 그 규모를 늘려가는데 담장의 둘레만도 수 리에 달했다고 하며, 고종이 머물던 창덕궁과의 왕래를 쉬이 하기 위해 운현궁과 이어지는 흥선대원군의 전용문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규모와 위세를 짐작할 수 있겠다.
입구로 들어서면 이 집을 지키던 사람들이 머물던 수직사가 오른편에 있고 그곳을 지나면 노안당이다. 노안당은 사랑채로, 대원군이 머물렀던 곳이다. 지금껏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 후기 양반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노안당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자를 집자해서 만들었다 하며, 처마를 이중으로 두르고 있는 보첨도 이 건물의 볼거리이다. 옆으로 이어지는 노락당은 운현궁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데 고종이 명성황후 민 씨와 가례를 올린 곳이 바로 여기다.
안으로 더 들어가면 안채로 쓰였던 이로당이 있는데, 대원군의 부인인 민씨가 살림을 하던 곳이다. 밖에서 보면 사방이 개방되어 있는 듯 보이나 계단을 올라 안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된다. 가운데 중정이라는 ‘ㅁ’ 자형의 작은 마당이 마루로 둘러싸여 있는데 안채가 가지는 성격에 따른 폐쇄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구조라 할 수 있겠다. 이로당을 나서면 앞으로 작은 기념관이 있어 흥선대원군이 주장했던 쇄국정책을 알리는 척화비와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등을 모형으로 볼 수 있다."u
[네이버 지식백과] 운현궁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2010.1.15, 마로니에북스)
유물전시실까지 관람을 하고 1시 쯤 안국역을 지나 재동의 마산해물아귀찜 집으로 가서 해물탕과 아귀찜으로 거하게 송년회를 가졌다.
회식자리로 온 두 명과 함께 17명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가며 가는 해를 아쉬워했다.
식사는 그동안 자녀결혼이 있었던 두 회원이 부담하였다.
식사 후에 헌법재판소 뒷뜰에 있는 백송을 둘러보고 기념사진을 찍고 안국역에 와서 헤어졌다. 꼬리가 긴 참새들은 종로로 접어들어 뒤풀이를 이어갔다.
송년회가 식사와 노래방을 가는 것이 아나라 무언가 뜻있는 추억의 행사로 마무리 한 것 같다.
2013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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