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낭(모나코 호텔)~차이나 해변
2월 20일 (월) (다낭~차이나 해변)
아침에 호텔을 나와 산책을 나섰다. 호텔 주변에는 도시계획 구역이지만 아직 빈터에는 채소를 재배하고 있다. 부지런한 농부들이 일을 하고 무언가 팔러 가는 아낙네는 베트남 모자 ‘논(non)’을 쓰고 있다. 베트남 전쟁 뉴스에 베트콩들이 저 모자를 쓰고 민간인으로 위장해서 농촌마을에 숨어 게릴라전을 했다고 본 것 같다.
베트남 전쟁은 우리나라 이동외과병원, 비둘기부대(공병대 중심), 맹호부대(육군), 청룡부대(해병대), 백마부대(육군 9사단) 등 5만 여명의 대부대를 형성하였고, 약 312,853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약 5,000여 명의 젊은 생명을 잃었고 1만 6,000여 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1972년 젊은 병사들의 목숨과 지금도 부상과 고엽제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많은 파월장병 용사들의 덕분에 우리나라는 경제 성장을 할 수 있었다. 1960년대 북한의 적화통일 야욕을 저지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엔 미군 주둔이 필수였고, 미국은 월남전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기 위해 주한 미군 2개 사단을 철수하여 월남전에 배치할 계획이었다. 그때 우린 북한보다 못 살았고 국방력도 열세였다. 월남전에 연합군으로 파병하여 참여한 대가로 M16 소총과 각종 화포를 생산할 수 있는 방위산업공장을 육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월남전으로 인한 우리 장병들에게 지급된 경비 중 약 10억 달러와 기타 원조 차관 등 50억 달러가 유입되어 경제 사회에 미친 영향도 대단한 것이었다. 1964년 기준 국민 소득이 북한 153달러인데 남한은 103달러에 불과했다. 국방력의 열세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후 1969년에 북한 194달러, 남한 210달러로 역전이 되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김신조 일당 무장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 습격사건을 일으킨 것도 경제 역전에 대한 북한의 발악이었을 수 있다. 이것을 계기로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는데 그해 북한은 청와대 습격사건 실패의 만회와 반정부 민중봉기를 위한 거점 마련 차원에서 10월 30일부터 3일간 울진 삼척지구에 무장병력 120명을 침투시키는 만행을 또 저지른다. 다행히 12월 26일까지 무장공비 113명 사살 7명 생포로 2개월에 걸쳐 소탕이 되었다. 이 두 사건도 월남파병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월남 파병으로 인한 군사력 열세를 이용한 적화통일을 꿈꾼 것 같다. 1973년 파월사령부가 철수하며 월남 전쟁에서 발을 뺐지만 1975년 4월 30일 월남은 패망한다. 내가 1975년 2월 입대할 때는 월남전이 종식되지 않아 전쟁 시 군인보수법에 의한 급여 수령자를 지정했었다. 월남전 파병, 김신조 청와대습격사건, 실미도 특수부대 훈련, 삼척울진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승복, 월남패망과 종전 그리고 1992년 한ㆍ베트남 수교, 우리는 지금 회갑 기념 여행 등 모자 하나에서 많은 일들이 생각난다. 전쟁은 최고로 나쁜 것이여......,
차이나 해변(미군들의 휴양지였던 곳으로 현지인들은 My Khe 해변이라 함)으로 가는 골목길 끝 대로에는 가로수로 야자수를 조성해 놓았고, 그 한편으로 술집이 늘어서 있다. 해변에는 바람이 많이 불어 파도가 심하다. 일찍 나온 사람들이 썰렁한 날씨에 산책을 한다. 웨딩촬영을 나온 예비부부도 있고 결혼식 식전행사인지 신부와 그의 가족들이 나와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광장은 잘 조성되어 있는데 날씨가 문제다. 마치 스리랑카의 트린코말리처럼 겨울에 북동계절풍이 불어서 흐리고 비가 오는 날씨와 같다.
돌아오는 길에는 호텔 신축현장들이 많이 보였고 단독 주택들은 저마다 모양새가 달랐다. 프랑스의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똑같은 주택이 하나도 없다. 토지를 장방형으로 구획하여 모든 집들을 도로에 접하도록 배치하녀 골목을 없앴으며, 손재주가 좋은지 대문, 현관, 창틀, 지붕, 기와색 등이 다르고 재배하는 화훼들도 제각각 달랐다. 그동안 생각했던 베트남과는 다른 이미지이다. 어느 한 집의 대문이 열려있어 들어가 마침 정원 정자에서 차를 마시는 대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찍었다. 대형 3층 저택으로 야외 식탁, 수영장, 정자, 분수대, 대형 분재와 고급 정원수, 차고, 큰 대문 등 한국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호화주택으로 보였다. 베트남에도 빈부 격차가 큰 모양이다.
돌아오는 골목에는 영업을 시작하는 거리 상점과 출근하는 사람들이 아침을 먹는 모습이 보였다.